지방의회 진출 고작 1%대..투표과정 배려 부족

장애인 단체들 "의석 할당제 실시해야"

시각장애인 임모(44)씨는 재작년 7월 서울시교육감 선거를 위해 투표소에 갔다가 무척 당황했다.

투표를 위해 필요한 시각장애인용 보조용구가 마련돼 있지 않았던 것. 투표관리인이 찾아주기를 한참 기다리던 임씨는 결국 가족에게 대리투표 하도록 했다.

임씨는 "비밀선거가 보장되지 않은 장애인 차별이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고, 인권위는 차별을 인정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 김모(47.여)씨도 같은 선거에서 불편을 겪어야 했다. 계단으로 된 투표소 입구에 경사로가 설치되지 않아 경찰관 2명의 도움을 받아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김씨는 "장애인의 선거권을 위한 편의가 제공되지 않았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냈고, 역시 차별로 인정받았다.

◇장애인 선거권 보장, 아직 멀어

2008년 4월부터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설비, 정보, 보조기구, 보조원 등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규정은 법규상의 권리일 뿐 장애인의 참정권 행사에는 아직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이 남아있다. 임씨와 김씨가 투표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은 그 중 일부일 뿐이다.

오는 6월2일 시행하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최근에는 선거용 홍보 책자가 논란이 되고 있다.

종전 선거법은 `점자형 홍보 책자는 일반 홍보 책자와 같거나 줄어든 내용을 실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올해 개정된 선거법은 `점자형 홍보 책자의 면수는 일반 홍보 책자와 같아야 한다'고 바뀌었다.

시각장애인들은 `탁상 행정'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보통 점자 크기는 일반 글자보다 커 같은 내용을 담으려면 3배의 면수가 필요하다. 이를 무시하고 같은 면수로 점자용 책자를 만들면 그 내용은 일반 책자보다 훨씬 빈약할 수밖에 없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이승철 연구원은 "더 많은 국민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국가의 의무다. 장애인의 선거 참여를 소홀히 한 이번 조치는 국가가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측은 "선거를 앞두고 있어 관련 법규를 개정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밖에 ▲점자용 홍보 책자의 제작 의무화 ▲후보자가 연설할 때 수화통역사 배치 ▲시각장애인을 배려한 선거 관련 홈페이지 마련 등도 장애인의 참정권 확대를 위해 요구되는 사항들이다.

인권위의 한필훈 조사관은 "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려면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하지만, 장애인 유권자가 소수라는 이유로 배려가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고 말했다.

◇장애인들, 비례대표 할당제 요구

2006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는 광역의회에서 11명, 기초의회에서 35명의 장애인 의원이 배출됐다.

하지만, 이는 총 유권자 중 장애인이 차지하는 비율을 고려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6월 지방선거에 참여하는 국내 유권자 수는 총 3천878만 명이다. 보건복지부에 등록한 장애인 중 19세 이상 유권자가 236만 명이므로 장애인 유권자의 비율은 6%대에 달한다.

그러나 2006년 치러진 민선 4기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장애인 의원은 총 의원 수의 1%대에 지나지 않았다. 기초의원은 35명, 광역의원은 11명이 당선돼 각각 1.21%, 1.5%에 불과했다.

임수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책팀장은 "개인적인 불이익 등을 우려해 복지부에 등록을 안 한 장애인도 상당수라는 것을 감안하면 장애인 의원 비율은 너무 낮다"고 말했다.

장애인 단체들은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여성에 배려되는 것과 같은 `비례대표 할당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 선거법에서는 `국회의원 및 지방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후보자는 50% 이상을 여성 후보로 추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지역구 후보자도 30% 이상을 여성 후보로 추천토록 권고하고 있다.

여성의원 비율이 전 세계 187개국 중 87위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한 여성의 정치 참여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이 조항이 마련된 것처럼 장애인들도 비슷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현재 장애인 단체들은 각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 중 10%를 장애인에게 할당토록 하는 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의 은종군 정책팀장은 "장애인이 처한 어려움은 장애인 스스로 가장 잘 알 수 있으므로, 장애인 의원이 늘어나면 장애인에게 필요한 법규 제정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실제 2008년 18대 총선에서 국회에 진출한 8명의 장애인 의원들은 장애인연금법 통과 등 장애인을 위한 입법 활동에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나라당 장애인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윤석용 의원은 "장애인의 정치 진출은 그동안 수혜적 입장에 놓여 있던 장애인들이 직접 입법 과정에 참여하는 `주체적' 입장으로 올라선다는 점에서 장애인의 전반적인 사회 진출 면에서도 큰 의의를 가진다"고 말했다